다이마루 신사이바시 편년사

창업의 뜻

~ 다이마루의 여정 ~

교토의 다이몬지에서 상호명의 힌트를 얻다

1717


히코에몬 상

다이마루는 1717년 시모무라 히코에몬(下村彦右衛門)이 후시미 이나리로 유명한 교토 후시미(伏見)에 포목점 ‘다이몬지야(大文字屋)’를 연 것이 시초입니다. 당시 일본은 에도시대로,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후시미는 교토와 오사카를 잇는 강에 항구가 건설되어 교통의 요새로 번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히코에몬은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무엇이든 남들보다 뛰어났습니다. 수줍음이 많았지만 붙임성이 좋아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다이몬지야’로 이름 붙인 사람은 히코에몬의 조부(祖父)였습니다. 그는 붉게 타오르는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의 다이몬지야를 장사 번영의 징조로 여겨 포목점 이름을 ‘다이몬지야’로 지었다고 합니다.

다이마루 마크에 담긴 깊은 의미는?

1728

다이마루 신사이바시점 남관 옥상 간판에 걸려 있는 다이마루 마크. 상호가 ‘다이몬지야’에서 ‘다이마루야(大丸屋)’로 바뀌게 된 시기는 히코에몬이 나고야에 가게를 낸 41세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一’과 ‘人’가 합쳐진 ‘大’에 우주와 천하를 나타내는 ‘丸’를 써서 ‘이 세상 제일의 상인이 되겠다’라는 히코에몬의 뜻을 담았다고 합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다이마루 포목점의 그림


우타가와 구니사다: 다이마루 포목점 앞의 그림(삼 미인도)

에도시대의 우키요에에는 다이마루야가 대규모 가게의 상징으로서 다이마루 마크(로고)가 들어간 노렌(가게 출입구에 내걸어 놓은 천)과 함께 자주 등장했습니다. 이 다이마루 마크는 가게의 오니가와라(도깨비 기와)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다이마루 마크는 이후 1913년에 정식 상표로 등록되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大’자의 끝 세 부분이 수염처럼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수염의 수는 ‘3개·5개·7개’인데, 이는 홀수를 운기 좋은 수로 여긴 중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렌


상표로 등록된 다이마루 마크


다이마루 마크가 새겨진 오니가와라

창업자가 소중히 되새긴 정신 ‘선의후리(先義後利)’

1737

히코에몬은 정성과 도리를 다해 장사할 것을 강조하며, 직접 붓으로 ‘선의후리’를 쓴 후 족자를 만들어 전점에 배포했습니다.


시모무라 히코에몬필 운영방침 족자

‘선의후리’란 중국의 사상가 순자의 영욕편에 나오는 ‘선의이후이자영(先義而後利者栄, 의로움을 앞세우고 이익을 뒤로 미루는 사람은 영예롭다)’을 인용한 고사성어입니다. 고객이나 사회와의 의(義)를 최우선시하는 것으로, 신뢰를 얻으면 이익이 따라온다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객 제일주의’, ‘사회 공헌’이지요.

1837년 대기근이 일어났을 때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오시오 헤하치로(大塩平八郞)가 오사카에서 군사를 모아 막부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사에서 유명한 이 사건은 ‘오시오 헤하치로의 난’이라고 불립니다. 헤하치로는 쌀을 사재기한 호상(豪商)을 차례로 습격했지만, 부하에게 ‘다이마루는 의상(義商)이니 범하지 마라’라는 명령을 내려 다이마루는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선의후리’는 3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는 다이마루의 경영 방침이자 전 직원이 마음에 새기는 고사성어입니다.

순자 ‘영욕편’

‘신센구미’ 대원복은 다이마루가 만들었다?


복원된 단다라 하오리

‘신센구미’를 아시나요? 19세기 말,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리던 교토에서 치안을 책임졌던 검객 집단입니다.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파벌과 목숨을 걸고 싸운 대원들의 삶은 수많은 TV 드라마, 영화, 소설, 만화의 소재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 ‘신센구미’ 대원복은 다이마루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밝은 청록색의 ‘단다라 하오리(하얀색 삼각형의 ‘단다라 무늬’가 들어간 일본의 전통 겉옷)’는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시선을 끌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하오리는 현존하지 않지만 신센구미와 연고가 있는 사찰로 알려진 미부데라(壬生寺)가 ‘단다라 하오리’의 복원 제작을 다이마루 교토점에 의뢰하였고, 그 후 완성된 복원품은 미부데라에 봉납되었습니다.

오사카와 걸었던 영광

~ 다이마루 신사이바시의 여정 ~

다이마루, 천하의 부엌 오사카에 진출하다!

1728


‘마쓰야 포목점’ 나니와 백경 사토노야 요시타키  에도시대 오사카점

교토 후시미에서 시작한 장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히코에몬은 39세 때 오사카 신사이바시에 포목점을 열었습니다. 이 포목점이 현재 다이마루 신사이바시점의 전신으로, 당시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이라고 불리며 전국에서 사람이나 물자가 몰려드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오사카에서는 상품에 정가를 매겨 현금을 받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포목점에서는 외상으로 판매하여 반년이나 1년에 한 번씩 수금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신사이바시스지 오사카점 그림’ 셋쓰명소도회

과감한 전략이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물건을 필요한 때에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되자 고객층은 부유층에서 서민층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개업하자마자 호황을 누리게 되어 빠른 속도로 직원 수를 늘리고, 가게를 증축할 정도였습니다.

막부에 상납하는 전비 때문에 위기를 맞다?

개업 초기부터 성장을 거듭해온 다이마루이지만, 때로는 시련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막부가 걷어가는 어용금이었습니다.


1804년에서1818년까지의 부호 순위

어용금은 이른바 강제 공채(公債)였습니다.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임시로 상납을 명령한 것입니다. 에도시대 말기에는 주로 전비(戰費) 조달을 목적으로 거두어들였는데, 오사카에서는 1731년부터 1869년 사이에 어용금을 13번이나 징수했습니다. 고액의 어용금과 장기 상환 약속 때문에 재정이 악화되자, 가게에는 종종 절약 통지가 내려졌습니다.

다만 장사에서 어용금은 곧 자금력을 의미하기에 ‘징수되면 불만스럽지만, 징수되지 않으면 신용에 문제가 생기는’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유행 상인 겨루기(오제키 다이마루야)

신발은 신은 채로 들어오세요!

1926

1903년 자우리식 가게의 모습

요즘은 신발을 벗고 백화점에 들어간다고 하면 깜짝 놀라겠지만, 옛날에는 신발을 신은 채로 백화점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진열장 시대의 신사이바시점

도쿠가와 막부가 다스리는 에도시대가 막을 내리고, 1868년에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일본이 근대국가를 꿈꾸며 서구문화를 도입하자, 전통 생활과 관습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다이마루도 포목점에서 백화점으로 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사카점에서도 가게 안쪽에서 상품을 꺼내온 후 바닥에 앉아서 판매하는 ‘자우리’를 중단하고, 상품을 가게 앞에 진열하는 ‘진열식’으로 바꾸었습니다.


1926년 광고

또, 1926년부터는 신발을 신은 채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미포장 도로였던 탓에 흙먼지가 날리지는 않을까 우려했지만, 예상외로 많지 않았던 덕분에 손님 수는 2배로, 매출은 3배로 늘었습니다.

보리스가 건축한 새 백화점의 탄생

1922-1933

오사카점은 1920년에 화재로 전소되었지만, 4기에 걸친 공사 끝에 훌륭하게 재건되었습니다. 설계를 담당한 사람은 미국의 건축가 윌리엄 메렐 보리스(William Merrell Vories)입니다. 25세에 교사 자격으로 일본에 온 보리스는 이후 건축가가 되어 일본 전국에 1,500개가 넘는 서양 건축물을 세웠습니다.

1933년 신사이바시점

제4기 공사가 끝나 전관이 완공된 시기는 1933년이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양식과 네오고딕 양식이 융합된 명건축물로, 보리스의 최고 걸작이자 일본 굴지의 백화점 건축물로 칭송받았습니다.


1933년 오픈형 천장(1937년 폐쇄)

1933년 1층 중앙 에스컬레이터 앞

1935년경 미도스지 측 현관

1933년 7층 일식당

1933년 지하철 신사이바시역 전광판 쇼핑은 신사이바시로 다이마루로

가게의 심벌이었던 공작 부각은 원래 실수였다?

1925

1925년 ‘다이쇼’

1962년 ‘쇼와’

1955년 ‘헤이세이’

2022년 ‘쇼와’

현재도 신사이바시스지쪽 정면 현관을 장식하는 도제 공작 부각은 제2기 공사가 끝난 1925년에 걸린 것입니다.

왜 공작이 모티브가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다이마루의 시모무라 사장이 미국 회사에 불사조 무늬를 의뢰했지만, 주문과는 달리 공작이 납품되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에는 드물게 공작 박제를 소장하고 있던 '공작집'이 가게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 이후 화려하고 패셔너블한 공작은 다이마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다이마루의 심벌 마크는 공작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사선은 공작의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문화와 트렌드의 중심 세계와 연결되는 신사이바시점!

1925년 신사이바시점 동남쪽에 설치된 오사카시 중심표

1925년 ‘오사카시 중심표’가 신사이바시점 남동쪽 각지에 설치되어 명실상부한 오사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62년에는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과 공동 광고 및 서비스를 제휴하여 영어·일본어로 쓰인 전면광고를 내걸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의 중심에 다이마루가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54년 신사이바시점 디올 살롱

또 다이마루는 1953년에 크리스찬 디올과 독점 계약하여 신사이바시점에도 ‘디올 살롱’을 선보였습니다. 일본 최초로 해외 디자이너와 제휴하여 파리에서 유행하는 패션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0 남관 ‘어린이관 부르종’ 팸플릿

1970년에는 남관이 완공되어 전 세계에서도 몇 없을 정도로 유니크한 일본 최초의 어린이 백화점 ‘다이마루 어린이관 부르종’이 오픈합니다.

1998 신사이바시 우후후 클럽 발족

1980년 아트 뮤지엄에서는 ‘스페인 회화 벨라스케스와 시대전’을 개최했고, 일본 최초의 개봉작에는 18만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었으며, 창업 270주년이었던 1987년에는 ‘로트레크전’도 개최되었습니다. 1998년에는 젊은 여성 고객을 대상으로 한 ‘신사이바시 우후후 클럽’을 발족했습니다. 다이마루만의 오리지널 판촉으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Barakura잉글리시 가든

또 2000년에는 본관 옥상에 유럽풍 정원 ‘바라쿠라 잉글리시 가든’이 탄생하여 도시 오아시스의 새로운 형태로 주목받았으며, 남관에는 여성 전용층 ‘릴렉싱 가든’도 오픈했습니다. 당시 여성 전용층이라는 새로운 발상으로 주목받은 ‘릴렉싱 가든’은 지금까지도 여성들에게 힐링을 주며 변함없는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시대에 발맞추는 문화의 중심지 신사이바시점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음을 알 수 있지요.

사진 제공: 다이마루 자료관

전설적인 보리스의 건축물이 훌륭하게 재현되다

2019

1933년 보리스의 설계로 완공된 다이마루 신사이바시점 본관은 오랜 세월 동안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지켜왔지만, 노후화가 심각해지자 재건축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귀중한 문화 자산인 보리스 건축물을 보존하자는 지역 유지나 지식인, 건축가의 의견에 따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외관과 인테리어를 최대한 보존하고 재현하는 방향으로 리뉴얼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2019년 9월, 약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본관이 리뉴얼 오픈되었습니다.

리뉴얼된 본관에서는 구 본관의 인테리어에 쓰였다가 보관되었던 부품 1258개 중 약 67%를 재사용했습니다. 또 미도스지쪽 외벽도 멋지게 재현하여 보리스 건축의 매력을 살렸습니다.